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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tled Document

백두산과 대간



불과 10년 전만 해도 중국은 비수교국가였다. 백두산을 가기 위해선 홍콩을 경유하여 방문허가서를 받아야 했다. 북경, 연변을 거쳐 백두산에 오른 건 91년 8월 7일 오후 5시경이었다. 안개가 잔뜩 끼어 걱정이던 측후소 앞에서 단숨에 내달아 천지를 바라보았을 때의 감격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곳엔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 민족의 성지, 영산이 있었다. 다시 가고 싶다. 폭포 쪽으로 올라가 천지의 물에 손을 적시고도 싶다. 할 수만 있다면 광개토대왕비도 보고 싶다. 꼭 그리할 것이다. 1991년 8월 7일 17시

 

연변으로 가는 항공기에서 내려다 보는 만주 벌판은 끝없는 수림의 평원이었다. 기울어 가는 저녁 노을 속에 짙푸른 숲과 굽이치는 강줄기는 묘한 조화를 이루며 보는 이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개국 성조의 큰 뜻과 고구려인들의 기상이 넘치는 듯했다. 전혀 낯설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 곳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만주 벌판을 달리고 싶다. 꼭 그리할 것이다.
1991년 8월 7일 17시

 

용정에서 광명학원 방문을 포기하고 대학 선배와 함께 윤동주 묘소를 참배하기로 했다. 가이드의 도움으로 택시를 대절하고 안내인을 수소문했다.안내인은 그곳 박물관에 근무하는 연구원이라고 했다. 안내인을 만나기 위해 박물관으로 갔다가 우리 설명을 들은 조선족 택시 기사가 묘소 위치를 잘 안다고 하여 안내원의 도움 없이도 쉽게 참배할 수 있었다.
우리들의 가슴 속 깊이 자리한 그 민족 시인의 혼백이 공동 묘지의 한 자락에 잠들어 있었다.
1991년 8월 8일 14시  


얼마 전에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 내고 나름대로 정화했다는 기사를 본 지라 저간의 사정은 짐작할 만했다. 일인 평론가의 도움으로 찾고 한인의 지원으로 다듬은 묘소는 양지 바른 자리였다. 술 한 병과 과자 몇 쪽을 제수 삼아 참배하는 내 맘이야 어디 둘 자리도 없었다. 그의 시는 이곳에선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고 했다. 독립을 노래하는 그의 시가 중국 땅 조선족 자치주에선 달리 해석될 수도 있을 법한 일이다. 윤시인의 묘에서 바로 보이는 자리엔 그의 사촌 청년문사 송몽규의 묘가 있었다. 1991년 8월 8일 14시

  

윤동주는 1943년 7월, 귀국하기 직전에 경도 제국대학에 재학중이던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된다. 1944년 6월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언도받고 둘은투옥된다. 그는 1945년 2월16일 옥사하고, 3월10일 송몽규도 그의 뒤를 따른다. 윤동주의 옥사 후 후쿠오카에 도착한 윤동주의 부친 일행이 송몽규를 면회하였을 때, 그는 주사를 맞기를 기다리는 대열에 섰다가 나와서 '윤동주' 하며 눈물을 흘렸다. 송몽규는 피골이 상접해 누구인가도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고 한다. 그의 묘지는유난스레 초라해 보였다. 1991년 8월 8일 14시

 
 

한라산 남벽 정상에서 백록담을 배경으로 찍었다. 눈부신 햇살과 지루한 산행의 흔적이 얼굴 표정에 역력하게 나타나 있다.

서둘러 단숨에 오르니 거기에 백록담이 있었다. 제법 많은 물을 가두고 당당하게 한반도의 끝자락에서 용머리를 틀고 여의주를 문 채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백두산에서 천지를 찍어대던 생각이 났다. 그 땐 정말 감격으로 제 정신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보단 났지만 그 감격이나 소회야 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참으로 기뻤다.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자랑을 했다. 백두산에 오를 때도 그랬지만 산정 근처의 구름들은 등산객들을 여간 놀리는 게 아니다. 금세라도 산정을 덮을 듯이 오르내리며 시야를 흐리게 하며 겁을 준다. 2000년 8월 18일 12시

 

진용진씨는 한라지킴이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를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만났다.

진달래밭대피소에서 한 산사나이를 만났다. 산행 첫머리에서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오르던 긴 수염의 사나이 배낭에는 옆으로 삐죽 나온 부탄가스통이 있어 그의 이력을 미루어 짐작하게 하고 있었다. 그 산사나이는 이 대피소 주인이었다. 진용진(秦勇珍, 011-9661-3332) 씨와는 하산시 대화를 나누고 그의 사진을 담아 왔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등산로는 전반적으로 돌길이고, 정상까지 9.6킬로미터로 멀어 여름이면 탈진사고가 많이 나고, 봄·가을에는 발목을 접질리는 일이 자주 있답니다."라는 언급이 있는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
18/08/2000]

 

노고단에서 이용재, 손진권, 황호양과 함께 한껏 멋을 부렸다. 지리산 종주 전, 철쭉이 흐드러지게 펴 있었고, 제 멋에 겨워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용재의 승용차로 구석구석 구경도 하고 지리의 풍광에 매료되었었다.
객지에서 온 셋과 텃밭에서 온 하나의 차림새가 또렷하게 다르다. 그 봄의 즐거움은 지금쯤 어디에 머물고 있는 것일까. 그리운 이들의 모습을 마음에 담는다. 1998년 5월 9일 오후

 

바래봉의 철쭉제를 다녀왔다. 이용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워낙 말수가 없는 그와 일생을 벗하며 절친하게 보내는 것이 여간 신기한 일이 아니다. 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묻는 말에 겨우 몇 마디 하면 그게 끝이다.
그 해 봄 바래봉 철쭉이 그리 좋다길래 무작정 내려갔다. 날씨가 아주 나빴고 강풍이 온 산을 휘젓고 내달았다. 그래도 엉금엉금 올라간 바래봉엔 철쭉이 한편 이울고 한편 흐드러져 있었다. 그 봄과 친구가 새롭게 그립다. 1998년 5월10일 오전

 
 

왼쪽부터 성민용, 조현종(나는 그를 당현종이라 부른다.), 이용재, 양창순, 황호양이다.

아마 이 사진은 손진권이 찍었을 것이다. 일행이 8명이었는데, 이수천과 김상길 둘은 해돋이 보는 걸 포기하고 더 급한 용무를 위하여 하산했기 때문이다. 사진에 나오지 않은 그는 참으로 재주꾼이다. 못하는 게 없다. 왼쪽 둘은 성민용과 조현종이다. 이들이 지리산 종주의 부대장과 대장이다. 둘 다 육질 좋은 한우를 연상시킨다. 참으로 힘이 장사다. 오른쪽 끝의 황호양은 최고의 신사다. 그도 이용재처럼 말이 없다. 그가 가져 온 가양주의 특미와 백무동에서 제공한 은어의 별미가 군침을 돌게 한다. 1998년 7월 29일 새벽

 

이용재를 포함하여 일행 8명이 지리산을 종주하고 마지막날 새벽 천왕봉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러나, 1997년 7월 30일 새벽 천왕봉에 처음 올랐을 때가 더 기억에 남는다. 그 때는 전주에서 백무동을 가는 아침 7시 10분 버스로 출발했다. 남원 터미널에서 물 한 통, 빵 몇 개, 참외 몇 개를 샀다. 백무동에 도착한 시각은 9시 40분. 용재는 장터목에서도 식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뉘엿뉘엿 걷다가 젊은 등산객들을 만났다. 그들은 장터목에선 취사는 할 수 있어도 매식을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오후 2시 20분 장터목에 다다랐다. 그 시장기야 오죽하겠는가. 아무런 대책도 없다. 중턱에서 만났던 두 청년이 한 말이 떠올랐다. 그들은 제 몸 무게만한 배낭을 지고 오르면서 웬만하면 자기들 텐트가 크니 함께 자도 좋다고 했었다. 과연 그 청년들은 이미 텐트를 치고 이른 저녁 식사 준비 중이었다. 반갑게 맞아하며 산장보다 쾌적할 터인즉 함께 지내자고 한다. 에라 모르겠다. 그리 하자.
저녁 잘 얻어 먹고 잠자리 따뜻했다. 여름의 지리도 제법 쌀쌀했다. 내가 그 청년들에게 보낸 호의는 한 캔에 몇 천원 하는 크라운 맥주 열 캔이었다. 오래 전에 사라진 크라운 캔맥주가 그 심산엔 살아 있었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천왕봉 일출도 보고 아침 식사도 얻어 먹고 함께 세석평전 쪽으로 길을 옮겼다. 그들의 빠른 걸음에 얼마 되지 않아 아쉬운 작별을 했다. 그들의 호의가 그립다. 그리고 그 후 세석에서 백무동까지 내려오는 그 지리한 계곡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1998년 7월 29일 새벽

   

고남산 정상에서 멀리 생가 마을을 배경으로 찍었다. 남원 산동과 운봉의 경계를 이루는 고남산 정상이다. 멀리 보이는 산자락 아래가 나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실낱처럼 가로 질러난 길은 자갈 부역도 나가곤 했던 '신작로'이다. 거의 40년만에 올라 본 고남산의 감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리움과 아쉬움이다. 유년 시절의 온갖 추억이 되살아났다. 그곳엔 지금도 나의 모든 것이 머물고 있다.   2000년 3월 5일 오전

 

장수 백운산 정상에서 동행한 김준환 선배와 함께 찍었다. 이 구간 산행에서 예상을 깨고 최선두로 나서 앞서가다 보니 실종인간이 되고 말았다. 김 선배가 무전으로 후미그룹부터 날 찾아보고 꼭 있을 법하고 연락 가능한 모든 그룹에 연락을 해 봤으나 도무지 그럴 리가 없는데 실종이었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최선두에는 안내 가이드도 없이 젊은 동행인뿐이었으니. 모두들 그 양반이 아마 선두엔 없을 거라 하여 중재에서 쉬면 한참 기다렸다나. (아래에 계속}

 

백운산 정상에서 다들 날 보고 놀라는 눈치였으나 실상은 어이없어하는 것 같았다. 어쨌건 정상에서 기념 촬영도 하고 다음 일정을 헤아려 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얘기로 즐거웠다.

장수 백운산에서 영취산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산죽밭에서 찍었다. 운치는 있지만 앞으로 나가기가 어간 불편한 게 아니다. 영취산은 대간에서 정맥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멀리 보이는 산 그림자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 아래에 무령고개가 있다. 무령고개의 주차장 아스팔트 옆에 있는 약수의 맛은 참으로 일품이다. 시원하기 그지없다. 이 날 만난 부산 낙동산악회의 병어회 한 점의 맛 또한 잊을 수 없다. 그 다음 산행 때 만나기로 했으나 만나지는 못했다. 동해안의 산불로 인해 백두 대간 산행 일정이 조정되고 5월 15일까지 주요 등산로가 폐쇄되는 바람에 파행적인 일정이 펼쳐질 수밖에 없었다. 백두 대간 종주의 최대 고비는 추풍령이라는 말이 새롭다. 포기하는 등산객이 속출하고 추풍령을 넘으면 완주하기가 쉽다고 했다.
2000년 4월 2일 오전

  

깃대봉에서 멀리 축령산을 바라보며 춘흥과 취흥에 잠겨 있다. 그들은 이 날 8시간 걸었다.[2001. 04. 01]

상봉역 앞에서 만나 1330번 좌석을 타고 가다가 원대성에서 내렸다. 안대성을 지나 은두봉 옆의 680봉에서 우측의 능선을 따라 마냥 걷다 보니 깃대봉이 나타났다. 막걸리도 한잔 하고 신선배와 권후배가 마련해 온 김밥도 먹었다. 꿀맛이 따로 없었다. 앞으로도 그런 김밥을 계속 먹었으면 좋겠다. 어쨌든 나는 꽃을 찍고 그들은 칡을 캤다. 그들은 장딴지보다도 더 굵은 암칡을 배낭에 지고 숨들을 헐떡였다. 우리들은 청평읍으로 내려와 하산주를 마셨다. 그리고, 귀경 열차에서 젊은이들과 하나 되는 열린음악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왼쪽부터 양창순, 권요한, 김준환, 신동령이다.

   

금년 고대산 옛 약수상회 앞에 세워진 등산로 안내도이다. 너무 커서 보는 이를 압도한다.

고대산 산행은 신탄리역에서 곧바로 시작된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산밑 약수상회에서 여기서 세 개의 등산로로 갈린다. 오른쪽부터 1, 2, 3 등산로이다. 제2등산로가 가장 가파르지만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제2등산로로 오른다. 나는 주로 한가한 제3의 길을 택한다. 그 중에서도 철수한 군영지쪽으로 오르는 것을 좋아한다. 폭포 입구를 지나 군취수장쪽 갈림길에서 땀을 식히곤 한다. 인적이 드물다. 능선으로 오르는 가파른 길을 단숨에 오르면 숨이 헉헉거린다. 그리고, 시야가 탁 트인 능선에 서면 철원평야와 백마고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늘의 산 10/16의 글]

 

제3등산로로 오르면 보면 만나게 되는 표범폭포 아래에서 올려다 본 정경이다. 여름에는 제법 수량이 많다. 겨울에는 등산로 거의 모두가 빙판을 이루곤 한다.

민통선을 개방하면서 오를 수 있게 된 고대산은 이미 십여 차례 올랐었다. 반은 혼자서 찾았고, 반은 친지나 후배들과 올랐다. 함께 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건 접근하는 교통편의 낭만, 산행의 서정, 조망의 광활, 경관의 수려, 미각의 신선함이 조화롭게 이어지는 산행이라 언제나 각별한 느낌을 주어 쉬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의정부역에서는 06시부터 22시까지 매시 20분에 신탄리행 경원선 열차가 출발한다. 신탄리역까지의 거리는 57.6km이고, 시간은 1시간 18분이 소요되어 출발 다음 시 38분에 도착한다. 신탄리역에서는 06시부터 22시까지 매시 정각에 출발하여 출발 다음 시 13분에 의정부역에 도착한다. 통일호 열차지만 아주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멋스럽기 그지없다. 09시대 이후의 열차만 되면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빈다. 신탄리역까지 1,900원이던 요금이 200원 올라 2,100원이 되었다. [오늘의 산 10/16의 글]

 

제2등산로로 오르다 보면 정상이라고 착각하기 쉬운 봉우리가 하나 있다. 그 봉우리에서 바라본 정상의 모습이다. 초병의 경계가 끊이지 않는 헬기장에 '고대봉'이라는 표석이 있다.

새천년 연초에 세운 고대산 표지석이 나를 반긴다. 겨울산행 때는 결빙이 심하고 장비가 부실한 탓으로 동행이 힘들어 하여 폭포쯤에서 포기하고 돌아갔었다. 그러나, 봄꽃이 흐드러지던 봄산행 때 만났었으니 구면이고 반길 만하다. 산 아래로 동송이 보인다. 그 위로 보이는 학저수지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 늪지로는 거의 유일할 것이라고 한다. 늪지 식물이 꽃을 피우는 때는 언제인가. 때를 맞춰 한번은 가 봐야겠다. [오늘의 산 10/16의 글]

 

고대산 정상의 헬기장에서 비무장지대를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누런 빛을 띤 비무장지대가 철원평야를 가로지르고 있다.

고대산 정상의 초병이 이르길 금년엔 그렇게 눈이 많이 내려도 비무장지대에는 눈이 쌓이질 않는단다. 그런 말을 듣고 보니 과연 그렇다. 남북으로 하얗게 눈이 쌓여 있는데 비무장지대는 누런 띠를 두르고 널려 있었다. 참으로 신기했다. 알 수 없는 금잔디를 깔아놓은 듯 뚜렷하게 구분된다. 아마 짐작컨대 남북의 한계선까지는 전답으로 개간을 했기 때문에 그 위에 눈이 쌓이지만, 울창한 풀숲을 이룬 비무장지대는 폭설이 내려도 그 숲 속으로 눈들이 내려앉았기 때문이리라. 자주 오지만 이렇게 또렷하게 남북방 한계선을 짐작해 볼 수 있었던 것은 처음이다 [오늘의 산 2/12의 글]

 

신탄리역은 경원선의 철도 중단점이다. 역사는 참으로 아름답다. 역사 앞에 세워진 안보 관광지 안내판만이 분단 상황을 실감케 한다.

신탄리역에서 휴전선까지의 거리는 10km도 안 된다. 남방한계선이 보이고, 그 너머로 백마고지 낙타고지 비무장지대 표지가 보인다. 그 안쪽으로 철원역, 노동당사, 철새도래지, 제2땅굴, 학저수지 등이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관광버스를 통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돌아보긴 쉽지 않다. 고대산에 올라 멀리 산천 경개를 조망할 따름이다.


북한산의 위문 위다. 백운대로 오르기 직전에 이수천, 손진권과 함께 어깨동물 했다. 이 둘은 대학 동기 동창이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웃음이 절로 난다. 이 날 눈길은 빙판이 되어 아이젠을 하고도 미끄러웠다. 따끈한 커피가 향기로웠고 인수산장의 우동균씨가 베푸는 호의가 따뜻한 그 해 겨울이었다. 그 우동균씨는 자리를 옮겨 지금은 북한산 송추 분소에 있다고 했다. 언젠가 만날 날이 있겠지. 우리들이 어찌 그를 용케도 기억하는지 신기할 노릇이다. 사는 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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